광양 망덕포구, 윤동주 詩 숨긴 항아리가… [고두현의 문화살롱]

입력 2022-02-04 17:36   수정 2022-02-05 00:10


섬진강물이 남해로 흘러드는 전남 광양 진월면 망덕포구. 옛 나루터 옆에 오래된 집이 한 채 보인다. 일제강점기 윤동주(1917~1945) 유고를 숨겨 보존한 국문학자 정병욱(1922~1982)의 옛집이다. 양조장과 살림집을 겸한 점포형 주택으로, 당시로선 보기 드문 구조다.

정병욱의 아버지 정남섭은 이곳에서 1934년부터 양조장을 운영했다. 경남 남해 태생인 그는 3·1운동 주도 후 하동으로 피신해 교편을 잡다 여기에 정착했다. 이 집에서 자란 정병욱이 윤동주를 만난 것은 1940년 연희전문학교(현 연세대) 신입생 때였다. 신문 학생란에 실린 그의 글을 보고 윤동주가 찾아왔다. 동주는 3학년이었고 다섯 살 많았지만 둘은 평생지기가 됐다. 기숙사와 하숙집에서 함께 생활했고, 문학과 예술을 논하며 조국의 앞날을 걱정했다.
북간도와 광양 잇는 문학 현장
동주는 습작시를 그에게 가장 먼저 보여줬다. 1941년 말 졸업을 앞둔 동주는 19편의 시를 정리해 시집을 내고 싶어 했다. 자필 원고 3부를 필사해 한 부는 스승 이양하 교수에게 주고, 한 부는 정병욱에게 건넸다. 그러나 일제의 탄압으로 출간을 포기하고 이듬해 일본 유학을 떠났다.

일제 말기인 1944년 1월, 정병욱은 학병으로 징집돼 일본으로 끌려가게 됐다. 떠나기 전 그는 어머니에게 동주의 원고를 맡기며 “소중히 간직하고, 둘 다 돌아오지 못하더라도 조국이 독립하면 세상에 알려 달라”는 말을 유언처럼 남겼다.

어머니는 날이 어둡기를 기다려 마룻장을 뜯고 항아리 속에 원고를 넣어 일제의 감시를 피했다. 습기가 찰까 봐 볏짚을 깔고, 마룻장 위는 나무 책상으로 가렸다. 그 사이 윤동주는 일본 후쿠오카 감옥에 갇혔고, 광복을 6개월 앞둔 1945년 2월 16일 옥사하고 말았다.

광복과 함께 극적으로 생환한 정병욱 앞에 어머니는 명주 보자기로 겹겹이 싼 원고를 내놓았다. 그는 상경하자마자 윤동주 가족에게 원고를 보였고, 다른 작품을 찾아 시집 발간에 나섰다. 이렇게 해서 윤동주 3주기인 1948년, 유고 31편을 묶은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정음사)를 출간할 수 있었다.

동주와 스승이 간직했던 원고는 유실돼 찾을 길이 없다. 정병욱이 지켜낸 원고가 없었다면 한국 문학사의 한 페이지를 통째로 비워둬야 할 뻔했다. 그런 점에서 ‘윤동주라는 빛(光)’과 ‘정병욱이라는 볕(陽)’을 아우르는 광양(光陽) 옛집의 의미는 각별하다. 북간도 용정 출신의 윤동주 문학이 한반도를 관통해 이곳 마루 밑에서 다시 태어난 것이다.

서울대 국문과 교수를 지낸 정병욱은 ‘잊지 못할 윤동주’라는 수필에서 “동주의 노래소리는 이 땅의 방방곡곡에 메아리치지 않는 곳이 없게 되었으니 동주는 죽지 않았다”며 “내 평생 가장 보람 있고 자랑스런 일은 동주의 시를 간직했다가 세상에 알린 것”이라고 회고했다.


그는 동주의 시 정신을 길이 빛내기 위해 자신의 호를 윤동주 시 ‘흰 그림자’에서 가져와 ‘백영(白影)’이라고 지었다. 그의 여동생 정덕희가 동주의 남동생 윤일주와 결혼했으니 사돈까지 맺었다.
정병욱 탄생 100년, 동주 서거 77주기

광양 진월 망덕길 249에 있는 이 집은 ‘윤동주 유고 보존 정병욱 가옥’이라는 이름의 문화재가 됐다. 지난해 보수를 마친 집 마루 밑에 항아리가 복원돼 있고, 옆에는 육필 시집 원고가 보관돼 있다. 강변 산책로를 따라가면 ‘윤동주 길’과 ‘윤동주 쉼터’ ‘윤동주 시 정원’도 만날 수 있다.

오는 16일은 윤동주 서거 77주기, 다음달 25일은 정병욱 탄생 100주년 기념일이다. 집 뒤편 산비탈에는 앞으로 특별한 별이 뜰 예정이다. 레이저로 별빛을 쏘아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형상화한다고 한다. 두 사람의 특별한 우정이 죽어서 더욱 빛나듯, 이곳을 찾는 순례객들에게도 흰 별빛 같은 축복이 환하게 비치길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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